관리자
2023-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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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은/궁동(어궁동) 혁신생태계 구축을 위한 새로운 접근방법 모색
대전광역시 유성구 부구청장 문창용
흔히 대덕특구를 ’한국의 실리콘밸리‘라고 이야기한다. 실리콘밸리가 대학, 연구소, 기업들이 집적돼 많은 연구성과를 창출하고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대덕특구가 한국의 실리콘밸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우수 과학기술 연구기관과 이공계 박사들이 많다고 해서 대덕특구를 실리콘밸리 같은 활력 넘치는 혁신생태계라 할 수 있을까. 성공적인 혁신생태계는 필요요소의 단순 집적보다 이들이 어떻게 상호 연결되어 성과를 내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실리콘밸리는 초기부터 그 지역 내에 협업, 기업가정신, 네트워크, 공동체정신 등 혁신의 기본원리를 커뮤니티 속에 자연스레 이식시켜 온 것에 기반한다. 이를 통해 실리콘밸리 구성원들은 혁신이 선순환되는 생태계를 스스로 창조해내었다. 따라서 전 세계 다른 지역에서 실리콘밸리 인프라를 단지 흉내낸다고 해서 그 생태계를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후발주자들은 이를 거꾸로 해야 한다. 즉 실리콘밸리 혁신생태계가 가진 혁신의 환경과 문화 등 그 토대부터 먼저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또 하나, 한국의 내로라 하는 기술기반 스타트업들은 왜 대전에서 창업해서 성장 기반이 마련되면 서울과 수도권으로 옮겨갈까? 대전은 초기창업에 강점을 보이지만 그들이 여기에서 스케일업을 시도하지 않는 건 어떤 약점 때문일까? 서울과 대전은 불과 2시간 내 거리이며 이는 실리콘밸리 이쪽 끝과 저쪽 끝보다도 가까운 거리일 텐데 말이다. 그건 스타트업에 필요한 자본투자와 관련해 서울에 집중돼있는 투자자들의 영향이 클 것이다. 또한 서울과 지방의 차이 나는 인력 채용 여건, 멘토시스템, 투자환경, 시장 여건, 해외와의 접촉 빈도, 창업시스템 성숙도, 동료그룹과의 접촉 빈도, 한국사람들의 서울 중심 인식구조 등이 요인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극복될 수 없는 것일까? 코로나 이후 새로이 생겨난 트렌드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전국 각지에 생겨나는 워케이션(worcation), 긱(gig)노동의 증가, 레트로 열풍, 다양한 가치소비 추구 등 이전과 다른 트렌드가 나타나고, 특히 젊은 세대들은 일과 삶을 조화하려는 의식이 강하며 대도시 지향의 대량소비보다 자기만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유니크한 경험 소비를 더 중시한다. 이는 나만의 공간 선호와 함께 인증, 공유에 진심인 성향, 비주얼 중시 및 외적 만족감을 충족시키는 소비 등의 특징으로도 나타난다. 따라서 그들은 판교나 테헤란밸리 같은 도심보다는 성수동, 연남로, 소제동, 제주, 부산 같은 스토리가 있는 장소를 더 선호한다. 그렇게 특정한 공간을 기반으로 이들을 묶어둘 수 있다면 그들을 중심으로 한 혁신생태계 형성은 이제 단지 수도권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적인 가치 판단 문제를 넘어선다. 오히려 밀도가 주는 재미와 비슷한 가치를 소비하는 동료의 존재 등을 통한 경험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사람이 모여드는 혁신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지역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시대적 트렌드에 따라 밀레니엄의 세대적 특징을 감안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는 딥테크 기반의 기술창업 중심지를 염두에 둔 대전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21세기 들어 AI, 빅데이터, 클라우드 등 기술발달에 따른 고도의 전문성을 장착하고 창의적인 활동과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을 중시하는 MZ세대 특성까지 가진 최근의 창업가들에게는 그들의 성향과 맞닿아 있는 활동 장소가 매우 필요하다. 즉 일과 여가, 취미와 직업이 구분되지 않고 특정 장소에서 함께 소비되는 장소만들기가 초기 창업생태계 구축의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따라서 특정한 공간을 배경으로 창업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물적 창업지원에만 몰두하지 말고 창업가들이 지역의 로컬에서 한데 어울릴 수 있도록 그들이 선호하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특정 경험을 함께 소비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는 실리콘밸리 등 성공적인 혁신생태계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화적 요소와 매우 관련돼 있다.
따라서 새로운 방식의 혁신생태계 조성을 위해서는 공공과 민간이 협업하여 수요자가 원하는 경험(UX)을 제공해주어 혁신적인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장소성을 형성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KAIST와 충남대 사이에 있는 어은/궁동(어궁동)은 이러한 시도를 실험해 보기에 매우 적절한 장소이다. 어궁동은 충남대와 KAIST가 입지하면서 조성되었지만 어느덧 40여 년 이상 된 대학촌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다. 특히 이곳은 대덕연구단지를 배후로 두고 있어 TIPS타운과 스타트업파크, D브릿지(대전테크노파크), S스퀘어브릿지(신한금융) 등 대전시(정부 연계) 차원의 창업전진기지 인프라가 입지해 있다. 또한 유성구청, 대전창조경제혁신센터 등 공공기관과 함께 청년들이 원하는 특색있고 다양한 로컬상점과 프랜차이즈, 어메니티 시설들이 집적돼 있다.
<그림 1> 어궁동의 지리적 범위
그런 차원에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실리콘밸리 등 성공한 혁신생태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먼저 이 공간에 구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방식은 사람을 특정한 공간에 모으는 활동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다섯 가지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먼저 미래상 그리기이다. 어궁동은 시대적 트렌드를 반영해 인재들을 기반으로 하는 창업생태계를 구축하기에 매우 적절한 곳이다. 다만 대덕특구 혁신생태계의 특성과 두 학교 및 대덕연구단지와의 기능적 연계, 글로벌 창업혁신공간으로서의 미래 비전 등을 감안하여 해당장소를 매력있는 공간으로 재설정(repositioning)하는 비전 만들기가 필요하다.
둘째 커뮤니티 기반 추진이다. 지속적인 혁신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예산의 단순 투입/산출 중심의 접근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즉 어궁동에 모이는 청년들의 세대적(世代的) 특성과 그들이 소비하는 경험이 갖는 시대적(時代的) 특성을 감안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이는 실리콘밸리를 비롯하여 볼더나 시애틀, 오타니에미, 시스타 등 성공적인 혁신단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인 공동체와 협업 중심의 커뮤니티 기반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셋째 로컬 기반 초기 접근이다. 해당지역의 지속적인 혁신을 위해서는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장소성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장소성은 우연한 기회의 포착, 함께 어울려 만드는 재미, 생각지도 못한 만남, 독특한 경험 소비, 다른 공간과의 차별성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은 기술창업을 하는 인재들도 선호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그런 경험을 제공해주는 로컬 기획자들의 작업을 촉진시켜 줄 필요가 있다. 로컬기획가들과 기술창업가들은 그렇게 서로의 필요를 만족시켜 줄 수 있으므로 그런 공간이 만들어진다면 자연스럽게 창의적 인재들이 모여들게 되는 장소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넷째, 지역실험의 시도이다. 그런데 그런 방식은 대규모 투자와는 다르다. 현대 소비의 특성은 다품종 소량생산이고, 롱테일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다양한 가치의 만족이다. 특별히 창의적인 인재들은 가치 소비를 선호한다. 따라서 이러한 소비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다양한 로컬상점과 독립서점, 별난 카페, 공연과 이벤트, 덕후들이 만들어가는 커뮤니티, 지역맥주와 재즈 공연 등 다양성이 확보되는 공간은 결국 그걸 소비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돼야 하는 데 이는 대규모 인프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다양성이 존중되고 실험정신을 마음껏 발산하며 최고보다 최초를 지향하고,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시간에 걸쳐 공간은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게 되고 그런 장소는 플랫폼이 된다. 따라서 지자체는 그들이 이러한 실험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어야 한다. 특히 큰 부담없이 이를 진행할 수 있도록 행정의 지원절차를 간소화하고 단순화 하는 것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민관협업방식 추진이다. 이러한 공간을 위해서는 공공과 민간이 협업해야 한다. 민간은 언제나 새로운 시도를 통해 지역과 공간에 침투하지만 항상 자본의 한계에 직면해 있고 성장의 임계치까지 규모를 키워나가기에는 늘 버겁다. 그리고 새로운 실험엔 언제나 리스크가 따르고 한 번의 리스크만으로도 그들은 다시 일어서기 힘겹다. 따라서 초기 마중물은 공공에서 부어줄 필요가 있다. 즉 초기 리스크는 공공이 부담하고 그 기반하에서 민간이 마음껏 활동하게 하는 이어달리기가 필요하다.
그와 같은 전제 하에 어궁동에서는 로컬을 기반으로 하는 장소성 획득을 중간목표로 해서 창업생태계 구축을 최종목표로 하는 여러 가지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이런 방식으로 혁신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움직임을 드러내는 활동가들을 모을 필요가 있다. 따라서 초기에 활동들을 알리기 위해 “어궁동 혁신포럼”을 개최하여 로컬을 기반으로 하는 활동가 모으기, 어궁동 자원조사, 기존활동 탐색 등을 추진하였다. 올해 6월 14일 개최한 제1차 포럼에서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두 명의 활동가를 통해 어궁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활동들을 발표하고 어궁동 혁신생태계 구축에 대한 여러 패널들의 토론이 있었다. 이어서 7월 25일 2차 포럼에는 제주에서 성공적인 창업생태계를 가꾸고 그 경험을 일반화 해서 「커뮤니티 자본론」책으로 펴낸 전정환 前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장을 통해 제주의 경험을 통해 본 어궁동의 혁신생태계 조성전략에 대한 발표를 들었다. 이처럼 조직화된 포럼을 통해 어궁동 활동가들이 장기적 관점에서 어궁동 변화에 대한 각자의 역할을 모색하고, 2024년 이후에도 그런 역할을 지속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나갔다.
<그림 2> 다양한 행사 포스터
한편 이러한 혁신포럼이 있기 전에도 2023년 1월과 4월에 어궁동 활동가들이 당근마켓과 함께 동네에 대한 개인의 이야기, 일과 연구, 개인의 경험을 나누는 ‘소름동네 포럼’을 개최하였다. 이 활동에서는 최대 10명 정도의 소모임을 통해 참가자들의 자발성을 바탕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이 포럼에서는 모두가 발제하는 형식을 취했으며 이를 통해 동네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동네에서 어떻게 소통을 더 확대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기초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일단의 커뮤니티에서는 2023년 3월에 동네 가게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 아이디어 해커톤을 개최하였다. Make Local Better라는 이름으로 개최된 해커톤에서는 더 나은 동네를 만들기 위한 메이커들의 도전들을 통해 문제해결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충남대에 인접한 궁동의 2개 가게, KAIST에 인접한 어은동의 2개 가게를 각각 선정한 다음 가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정의하고 문제해결에 대한 세부전략들을 다양한 참여자들의 협업을 통해 도출하였다. 그리고 이런 활동들을 통해 서로 관계를 형성하게 되자 어궁동 일대 다양한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추가적인 이벤트들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런 활동들은 동네를 재발견하고 관계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너드 스툴’, ‘너드들의 수다’ 같은 이벤트들과 충남대와 KAIST 학생들의 공동 프로젝트 모임인 ‘어궁동 청년단 어리궁절’이 그런 사례들이다.
또한 이러한 활동은 KAIST에 있는 대전창조경제혁신센터의 스타트업 투자유치 프로그램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대전창경센터에서는 올해 9.5(화)~7(목) 사흘간 개최한 2023년 스타트업 투자 위크(Start-up Investment Week) 행사를 기존의 대전컨벤션센터나 호텔이 아닌 궁동 욧골공원을 중심으로 한 골목길에서 개최하였다. 전국의 많은 투자자와 스타트업들이 큰 관심을 보인 가운데 3일간의 투자 IR이 동네 여러 군데의 카페와 식당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내년의 개최를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한편 샌프란시스코에서 최초로 열린 이후 매년 9월 셋째주 금요일에 전 세계 도시에서 개최하고 있는 주차장과 도로를 공원으로 만드는 프로젝트인 Parking Day도 개최하였다. 9월 17일부터 사흘간 유성구청과 경찰의 협조를 얻어 궁동의 한 골목길에 파란색 부직포를 깔고 의자와 탁자를 놓고 여러사람들이 모여 공연과 대화를 즐기는 공원으로 만들어 참여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였다.
<그림 3> 스타트업코리아 투자위크 행사 및 Bowtown Parkingday 포스터 및 현장 스케치
이러한 이벤트들은 어궁동이라는 동네를 바탕으로 로컬기획자들의 활동에 의해 어궁동의 장소성을 획득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시도들이 지속되면 어궁동은 모퉁이 돌아서 유니크한 카페와 식당, 그리고 특별한 경험을 제공해주는 서점과 공방, 메이커 스페이스와 공유공간 및 이벤트 장소가 있고 이러한 공간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내외국인 할 것 없이 모여드는 장소가 될 것이다.
이처럼 장소성을 통해 명성과 충성도를 획득한 지역은 모여드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플랫폼 성격을 갖게 되고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대덕특구 같은 경우는 이를 통해 기술창업이 활성화될 수 있는 토대도 형성되게 된다. 장소성을 획득하게 되면 공간을 수요하는 혁신가와 창업가들이 지역에 고착(lock-in)되어 대전을 떠나지 않고도 다음 단계를 모색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자체가 지역에서 창업을 활성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을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이전처럼 단순 인프라 구축이나 R&D예산 지원 같은 경로의존적 자원공급 중심 지원이 아니라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함께 혁신생태계의 미래상을 상상하고 이를 구축하기 위한 로컬 기반의 창조 커뮤니티 만들기와 그들이 한데 어울려서 혁신의 용광로를 만들 수 있는 지역실험 장려, 공공과 민간의 연결을 촉진시켜 줄 중간조직 활성화 등과 같은 정책들을 통한 장기적 관점의 접근을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대전의 대표적인 혁신공간인 어궁동에서 이제 막 시작하고 진행중인 이런 장기적 변화를 위한 단기적 행동계획들이 어궁동을 포함한 대덕특구에도 스며들어 앞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혁신생태계 모델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