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은
202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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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이것은 국가 안보의 문제입니다.”
이현익
STEPI 중소·벤처기술혁신정책연구센터 부연구위원
무기화된 상호의존: 자유무역 체제에서 탄생한 배타적 공급망의 역설
첨단기술의 본질적 가치는 ‘희소성’에 기인한다. 반도체 제조에 관한 국가 간 상호의존성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무기화된 칩 공급망의 위력은 복잡하게 뒤얽힌 가치사슬의 각 노드 대부분이 거의 독점적인 기업에 의해 지배된다는 ‘폐쇄성’과 이 과정에서 어느 한 기업의 외면만으로도 완성단계에 이르지 못하는 ‘배타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반도체 산업의 공급망 편재(偏在)는 경제민족주의적(economic nationalism) 시각에서 볼 때 국가 안보에 대단히 위협적인 현상이지만 “비교우위”라는 자유무역 원리의 산물이기도 하다.
E pluribus tres, 여러가지 중 셋
세계 최대의 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tsmc는 2024년에 1만 1,878가지 유형의 반도체를 288개 공정기술로 제조해 522개의 고객사에 납품했다. 이 회사는 한 해 2억 3천만대가 팔리는 애플의 아이폰 핵심 프로세서(AP)와 연간 100만대 수준으로 출하되는 엔비디아의 최신형 그래픽처리장치(GPU) 전량을 공급한다. 최상급 성능을 가진 칩의 90%,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반도체의 70%를 생산하는 tsmc의 장기 매출 총이익은 53%에 달하며, 매출액의 69%가 7nm(나노미터) 이하의 최첨단 노드 제품에 집중돼 있다. 이같은 숫자는 시장지배적 지위를 행사하고 있는 기업의 전형에 부합한다.
그러나 독과점적 경쟁력을 갖춘 파운드리 회사조차도 제조 공정에 필요한 주요 소재, 부품, 장비에 있어서는 글로벌 가치사슬(GVC)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다. 반도체 웨이퍼의 주재료인 석영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스푸르스파인에 소재한 광산의 독점적 채굴권을 가진 쿼츠 코퍼레이션에서 제공하고, 원료의 정제는 노르웨이 북부 드래그(drag)에 위치한 한 공장에서 이루어지며, 일본의 신에츠화학에서 초고순도 단결정 실리콘 웨이퍼로 가공된다. tsmc에 도착한 웨이퍼는 축구장 133개에 해당하는 95만m2 면적의 팹(fab)에서 3개월간 약 3,000여개의 공정을 거치는데, 제조에 사용되는 화학약품 대부분은 일본의 소수 기업(신에츠화학공업, JX금속, JSR, Toppan 홀딩스, 관동전화공업, 도쿄응화공업, 레조낙 홀딩스 등)에서 조달되며, 제조 기기는 공정 단위별로 미국(어드밴스드머티리얼즈, 램리서치, KLA 등)과 일본(도쿄일렉트릭, ULVAC, 어드밴테스트, 스크린홀딩스 등), 그리고 네덜란드(ASML) 기업의 특정 제품들로만 구성된다.
2000년 대 초까지만 해도 최신 반도체 공정 노드(130nm)를 다룰 수 있는 회사는 26개였으나, 2010년 대 이 숫자는 절반 이하인 10개에 불과했으며, 현재는 tsmc(대만), 삼성전자(한국), 인텔(미국)만이 7nm 이하의 공정으로 의미있는 칩 제조가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파나소닉, 산요, 샤프가 반도체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뗐고, 미국의 IBM은 양산(量産)에서 철수했으며, AMD의 생산부문은 글로벌파운드리즈로 분사됐다. Cypress(미)는 독일의 인피니온에, Freescale(미)은 네덜란드 NXP에 흡수되었고, 일본의 히타치 제작소, 미쓰비시전기, 일본전기(NEC) 반도체 사업부문이 분사, 합병해 르네사스(일)가 탄생하기도 했으나, 이들 모두 최첨단 반도체 제조에서 더 이상의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반도체 제조 공급망의 독과점적 체제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는 제조의 기술적 난이도가 높아짐에 따라 해당 기업이 수십 년에 걸쳐 공정의 한 분야만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데에만 집중하면서 가능했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ASML(네덜란드)의 서사는 독보적이다.
E pluribus unum, 여럿으로 이루어진 하나
10만여 개의 정밀한 부품과 도합 2킬로미터가 넘는 전선이 내장된 소형버스 크기의 최첨단 기계, 모델명 TWINSCAN NXE:3400C는 20년간 100억 유로(한화 약 15조원)가 넘는 연구개발비가 투입된 반도체 제조 장비로, 대당 1억 6,000만 유로(한화 약 2,300억원)를 호가하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 기기가 파장 13.5nm의 극자외선(EUV, Extreme Ultra Violet) 영역에 있는 빛을 생성해 13nm의 해상도로 300mm 실리콘 웨이퍼 한 장에 사람 머리카락 두께의 3만분의 1 정도인 선을 2000만 개 인쇄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21초, 시간당 170장 이상의 웨이퍼를 처리하며, 그 정밀도는 흔히 “지구에서 화살을 쏘아 달에 놓인 사과를 맞추는 정도”로 묘사된다. 네덜란드의 ASML사가 독점 공급하는 최첨단 노광장비 EUV 리소그래피 시스템은 7nm 노드 이하의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ASML이 가진 역량의 본질은 장비를 구성하는 부품의 조달업체로부터 나온다. 13.5nm 파장의 EUV는 진공상태에서 고속 운동하는 직경 0.003mm의 주석(Sn) 방울을 레이저로 2회 타격해 폭발시키고, 이를 초당 5만번 반복함으로써 생성된다. 앞서 언급된 극한의 정교한 가동 경로에 관여하는 기업은 영국의 에드워드배큠(진공), 미국의 사이머Cymer(광원시스템), 독일의 트럼프Trumpf(레이저)와 자이스Zeiss(반사경) 정도가 있다. 아직까지 대채제 개발은 요원하다. 그러나 이들 기업은 EUV 장비를 구성하는 부속품 공급업자의 일각에 불과하다. 한 전문가 추산에 따르면, ASML은 자사의 최신 제품 TWINSCAN 구성품의 15% 정도만을 자체적으로 마련할 수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수천여개의 특정 기업들에 의존하고 있다.
E pluribus unum, 여러 독점적 기업들이 이뤄낸 하나의 장비가 첨단 반도체 제조 생태계의 대체불가능한 조임목(choke point)을 형성했다. 하지만 ASML은 반도체 제조가 거쳐야 하는 3,000여 단계 중 기껏해야 한 부분에만 관여하고 있을 뿐이다.
AI와 반도체, 그리고 국가안보
기술에 관한 국가의 역량은 ‘대체불가능성’에 기인한다. 원동력은 기술혁신에 있다. 반도체 산업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지난 50년간 막대한 생산 설비 투자와 연구개발(R&D), 정부의 각종 보조금 혜택에 힘입은 미세 공정 발전과 이를 통한 트랜지스터 집적도 증가가 마이크로칩의 성능과 비용에 있어 획기적인 개선을 가져다주었다. 1958년, 텍사스인스트루먼츠 소속 연구원이었던 잭 킬비가 집적회로를 고안한 이래, 웨이퍼 당 트랜지스터 수는 1,000만 배 증가했고, 컴퓨터 중앙처리 장치의 속도는 10만 배가 향상됐으며, 비슷한 성능을 가정했을 때 비용은 매년 45% 이상 절감되었다. 그 결과, 1961년에 4개의 트랜지스터로 구현된 페어차일드반도체의 신제품 마이크로 로직 칩은 1cm2 면적에 190억 개가 넘는 트랜지스터가 집적된 형태로의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기업이 등장했다가 사라졌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기업의 혁신 역량은 소실되지 않고 국가에 축적되어 왔다.
오늘날의 반도체 산업을 지정학 관점에서 조망해 볼 때, 설계는 미국, 재료와 장비는 일본, 제조는 대만으로 대체할 수 없는 글로벌 공급망 구축이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한국은 없었다. 정확히는 기술의 한국은 없었다. 애초에 공급망의 비교우위를 ‘기술’이 아닌 ‘가격’으로 설정한 한국 기업에게 독보적 기술역량 획득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여기에는 반도체 산업에 대한 관조적인 정책 기조도 한몫했다. 경쟁의 주체인 기업 활동에 있어 정부의 무관심이 최선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에 매몰된 채 국가의 IT 하드웨어 인프라 전략을 민간에 일임해 온 결과, ‘대체불가능한 역량’을 축적하는 임무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다 어느새 메모리 반도체 강국의 입지가 흔들리고, 대만과의 격차가 확대되며, 중국의 역량이 커지는 우울한 현실과 맞닥뜨리게 됐다. 그사이 업계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무모한 정책 실험을 꾸준히 이어간 일본은 신생 국책 파운드리 라피더스의 2나노 양산 기술 획득이란 이정표를 세우고 있다.
“우리가 필요로하는 반도체에 대해 완전한 공급망 통제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국가안보의 문제입니다.”
지난 2025년 4월 9일, 미 하원 에너지 및 상업의원회 청문회 증인으로 나선 에릭 슈미트 전 구글 CEO이자 회장은 반도체, 인프라 및 에너지 산업에 관한 국가의 적극적인 정책 개입을 촉구하며 이렇게 발언했다. 그는 트럼프 1기에 추진된 인공지능 국가안보위원회(NSCAI)의 의장으로서 “미국은 대만과 한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으로 인해 자국 기업과 군대의 원동력이었던 최첨단 마이크로 일렉트로닉스를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슈미트 의장의 문제 제기 이후 글로벌 기술경쟁 환경은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한편 청문회 이후 7월 23일, 백악관은 미국의 “AI Action Plan”을 발표한다. 마이클 크라치오스 백악관 과학기술정책국장, 마크 루비오 국무장관 겸 국가안보보좌관 대행, 데이비드 색스 백악관 AI·가상화폐 차르가 이 계획의 중요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미국의 AI 행동계획은 국가안보 목적의 기술혁신과 이에 관한 통제를 정조준하고 있다. 만약 지금 우리의 반도체 정책에 결여되어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