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덕
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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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서 산업으로
AI는 왜 대전에서 시작되는가
연구도시에서 AI 생태계로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인공지능(AI)을 마주한다. 내비게이션은 최적의 길을 안내하고, 생성형 AI는 문서를 작성하며, 번역과 이미지 제작까지 돕는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미래 기술로 여겨졌던 AI는 이제 산업과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 기반기술이 됐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한 가지 질문에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AI는 과연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AI를 이야기하면 글로벌 빅테크 기업을 떠올린다. 그러나 AI는 어느 한 기업이 홀로 만든 기술이 아니다. AI 모델을 학습시키는 반도체와 컴퓨팅 기술, 알고리즘 연구, 산업 현장에 적용되는 응용기술까지 수많은 연구기관과 대학, 기업이 오랜 시간 축적한 연구개발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며 오늘의 AI를 만들어냈다.
대한민국에서도 이 생태계의 중심에는 대전이 있다. 대덕연구개발특구를 중심으로 연구개발 역량을 축적해 온 대전은 오랫동안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심장'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AI 시대에 대전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연구기관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늘날 대전의 경쟁력은 연구를 산업으로 연결하는 구조에 있다. 논문은 기술이 되고, 기술은 창업으로 이어지며, 성장한 기업은 다시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선순환이 도시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 AI처럼 변화 속도가 빠른 산업에서는 개별 기업의 역량보다 연구와 인재, 창업과 투자, 실증과 사업화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는지가 경쟁력을 결정한다.
이 같은 기반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1973년 대덕연구단지 조성을 시작으로 정부출연연구기관과 대학, 기업이 집적됐고, 이후 대덕연구개발특구를 중심으로 연구개발과 기술사업화 생태계가 꾸준히 확장됐다. 현재 특구에는 국내 최고 수준의 연구인력과 박사급 연구자들이 활동하며, 축적된 연구역량은 특허와 기술이전, 창업으로 이어졌다.
AI 시대에도 이러한 기반은 이어지고 있다. KAIST는 AI 핵심 분야 연구와 전문 인재 양성을 선도하고 있으며, ETRI는 초거대 AI와 AI 컴퓨팅, 지능형 반도체 연구를 수행하는 동시에 연구성과를 산업계로 이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연구실에서 탄생한 기술이 창업과 사업화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물론 연구만으로 산업은 성장하지 않는다. 기술을 시장으로 연결할 창업가와 실증 환경, 이를 뒷받침할 투자 생태계가 함께 갖춰져야 한다. 대전은 연구기관과 대학, 기업, 창업지원기관, 투자기관이 긴밀하게 협력하며 이러한 연결 구조를 오랫동안 다져왔다. 최근 AI와 반도체, 로봇, 바이오 등 다양한 딥테크 기업이 꾸준히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전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AI 기업이 많아서가 아니다. 새로운 AI 기업이 계속 탄생할 수 있는 생태계가 이미 구축돼 있다는 점이다. AI 산업의 경쟁은 화려한 서비스가 아니라 그것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토양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토양을 가장 오래 준비해 온 도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전이다.
AI 산업의 경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된다
생성형 AI의 등장은 인공지능 산업에 대한 인식을 바꿔 놓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AI는 이제 질문에 답하고 이미지를 만드는 서비스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산업의 관점에서 AI를 바라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리가 사용하는 서비스는 가장 바깥에 드러난 결과물일 뿐, 그 이면에는 반도체와 컴퓨팅 기술, 데이터 플랫폼, AI 최적화 기술 등 보이지 않는 기반기술이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
AI 산업의 경쟁도 바로 이 기반에서 시작된다. 아무리 뛰어난 AI 모델이라도 이를 뒷받침할 컴퓨팅 인프라가 부족하면 성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데이터 처리 효율과 메모리 구조, 전력 소비를 줄이는 최적화 기술 역시 AI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최근 글로벌 AI 산업에서 AI 반도체와 고대역폭 메모리(HBM), CXL, 온디바이스 AI가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 시장은 '더 큰 AI'보다 '더 효율적인 AI'를 요구하고 있다.
대전의 AI 기업들은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서 기반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공통점은 화려한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AI 산업 전체를 움직이는 핵심 기술을 다룬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기업이 파네시아(Panmnesia)다. AI 모델이 거대해질수록 컴퓨팅 시스템은 방대한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파네시아는 차세대 메모리 인터커넥트 기술인 CXL(Compute Express Link)을 개발하며 CPU와 GPU, 메모리를 보다 효율적으로 연결하는 기술을 선도하고 있다. 대규모 AI 데이터센터와 고성능 컴퓨팅 환경에서 CXL은 차세대 표준으로 주목받는 기술이며, AI 시대의 컴퓨팅 구조를 바꾸는 핵심 요소로 평가받는다.
AI를 산업 현장으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기술도 필요하다. 공장과 자동차, 산업용 로봇처럼 실시간 판단이 필요한 환경에서는 데이터를 서버로 보내지 않고 기기 자체에서 AI를 실행하는 온디바이스 AI가 중요해지고 있다.
노타(Nota AI)는 AI 모델을 경량화하고 최적화하는 기술을 통해 이러한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동일한 AI 모델이라도 더 적은 연산 자원으로 실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산업용 기기와 엣지 디바이스에서도 AI를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AI를 더 크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더 넓게 활용하는 기술인 셈이다.
AI의 성능은 알고리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데이터를 어떻게 구축하고 관리하며, 개발 과정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영하느냐 역시 중요한 경쟁력이다.
인공지능팩토리(AIFactory)는 AI 개발 플랫폼과 데이터 구축 환경을 제공하며 연구기관과 기업이 보다 효율적으로 AI를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제조와 바이오, 모빌리티 등 AI 활용 분야가 확대될수록 이러한 플랫폼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파네시아와 노타, 인공지능팩토리는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모두 AI 서비스를 직접 만드는 기업이 아니라, AI 산업 전체의 성장을 뒷받침하는 기반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기술은 일반 소비자가 체감하기 어렵다. 그러나 AI 산업이 성숙할수록 진정한 경쟁력은 화려한 서비스보다 이러한 기반기술에서 나온다. 서비스는 빠르게 바뀌지만 컴퓨팅 구조와 반도체, 데이터 플랫폼, AI 최적화 기술은 다음 세대 AI가 등장해도 계속 필요한 산업의 핵심 인프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대전 AI 생태계의 특징이다. 대전은 소비자를 향한 플랫폼 경쟁보다 AI 산업을 떠받치는 기반기술을 축적해 온 도시다. 무대의 조명을 받는 기술보다 무대를 지탱하는 기술에 강한 도시. AI 시대 대전의 경쟁력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기반에서 시작된다.
AI는 이제 산업의 현장에서 움직인다
많은 사람들에게 AI는 여전히 챗봇이나 생성형 AI 서비스로 인식된다. 하지만 산업 현장에서 AI는 훨씬 조용하면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고 있다. 생산 공정을 최적화하고, 물류의 효율을 높이며, 연구개발 속도를 앞당기는 등 AI는 이제 산업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기술로 자리 잡고 있다.
AI 산업의 경쟁도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초기에는 더 뛰어난 AI 모델을 개발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제는 그 기술을 현실의 문제 해결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적용하느냐가 경쟁력이 되고 있다. AI의 가치는 기술 자체보다 산업 현장에서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어 내는지에 달려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다. 제조업에서는 생산 공정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불량률을 낮추고, 물류에서는 자율주행 로봇이 작업 동선을 최적화한다. 바이오 분야에서는 AI가 방대한 연구 데이터를 분석해 신약 개발과 진단을 지원하고, 우주산업에서는 위성영상을 분석해 재난 대응과 국토 관리의 정확도를 높인다. AI는 하나의 산업이 아니라 모든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범용 기술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대전의 AI 기업들도 이러한 변화의 최전선에 있다. 이들의 경쟁력은 새로운 서비스를 만드는 데 있지 않다. 각 산업이 오랫동안 안고 있던 문제를 AI로 해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대표적인 사례가 자율주행 로봇 기업 트위니(Twinny)다. 물류센터와 공장에서는 수많은 사람과 장비가 동시에 움직인다. 트위니의 자율주행 로봇은 AI를 활용해 주변 환경을 실시간으로 인식하고, 작업 상황에 맞춰 최적의 이동 경로를 스스로 판단한다. 단순한 자동화를 넘어 사람과 협업하는 지능형 물류 시스템을 구현한 사례다.
바이오 분야에서는 토모큐브(Tomocube)가 AI 기반 영상 분석 기술을 활용해 연구 효율을 높이고 있다. 홀로토모그래피 기반 3차원 세포 이미징 기술로 확보한 방대한 데이터를 AI가 빠르고 정밀하게 분석하면서 연구자는 반복적인 분석보다 연구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우주산업에서도 AI는 필수 기술이 되고 있다. 하루에도 막대한 양의 위성영상이 생산되는 시대에는 사람이 모든 데이터를 분석하기 어렵다. 에스아이에이(SIA)는 AI를 활용해 위성영상 속 변화와 객체를 자동으로 탐지하고 분석하며 재난 감시와 국토 관리, 국방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도를 높이고 있다.
세 기업이 활동하는 분야는 물류와 제조, 바이오, 우주산업으로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AI를 새로운 산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 산업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글로벌 AI 산업의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생성형 AI가 기술 혁신의 출발점이었다면, 이제 시장은 AI를 실제 산업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적용하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결국 AI 산업의 승자는 가장 뛰어난 모델을 만든 기업이 아니라, 가장 많은 산업 문제를 해결한 기업이 될 가능성이 크다.
대전 AI 생태계의 경쟁력도 여기에 있다. 연구기관에서 축적된 원천기술은 창업으로 이어지고, 기업은 제조와 물류, 바이오, 우주산업 등 다양한 현장에서 AI의 새로운 활용 가능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연구실에서 시작된 기술이 산업 현장으로 확장되고, 그 경험이 다시 새로운 기술 개발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대전 AI 생태계의 가장 큰 강점이다.
AI 시대가 선택하는 도시
AI 산업은 지금도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생성형 AI를 넘어 AI 에이전트와 피지컬 AI, 자율제조와 휴머노이드 로봇 등 새로운 기술이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기술은 계속 바뀌겠지만, 한 가지는 변하지 않는다. 새로운 산업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AI 역시 오랜 시간 축적된 연구개발과 이를 산업으로 연결한 기술사업화, 우수한 인재를 길러낸 대학과 연구기관, 창업가의 도전,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투자와 실증 환경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다.
이제 AI 산업의 경쟁은 개별 기업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연구가 창업으로 이어지고, 기술이 산업으로 확산되며, 실패와 도전이 반복될 수 있는 생태계를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가 도시와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
대전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이러한 기반을 꾸준히 축적해 왔다. 정부출연연구기관과 대학에서 시작된 연구는 기술이전과 창업으로 이어졌고, 성장한 기업은 다시 연구개발에 투자하며 새로운 혁신을 만들어 왔다. 파네시아와 노타, 인공지능팩토리, 트위니, 토모큐브, 에스아이에이와 같은 기업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도 이러한 선순환 구조에 있다.
물론 AI 산업의 미래를 한 도시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수도권은 물론 부산과 광주, 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도 AI 산업 육성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으며, 글로벌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오늘의 경쟁력이 내일도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대전이 갖는 의미는 분명하다. 대전은 화려한 AI 서비스를 가장 먼저 만들어낸 도시라기보다, 새로운 기술이 지속적으로 탄생하고 산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생태계를 가장 오랫동안 준비해 온 도시다. 연구개발과 인재, 기술사업화와 창업이 하나의 구조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경험은 단기간에 구축하기 어려운 자산이다.
그래서 지금 던져야 할 질문은 "대전에 AI 기업이 몇 개 있는가"가 아니다.
왜 새로운 AI 기업은 계속 대전에서 등장하고 있는가.
그 답은 특정 기업의 성공 사례보다, 반세기 동안 축적된 연구개발 역량과 이를 산업으로 연결해 온 도시의 구조에 있다.
결국 AI 시대가 선택하는 것은 하나의 기업이 아니라 하나의 생태계다. 연구가 산업으로 이어지고, 산업의 경험이 다시 새로운 연구를 만드는 선순환이 이어질 때 도시의 경쟁력도 함께 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전은 대한민국 AI 산업의 현재를 보여주는 도시인 동시에, 다음 세대 AI 생태계가 나아갈 방향을 가장 먼저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